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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유의 마을 이름과 지명의 어원

"회기역 근처는 왜 회기(回基)인가?" – 고려시대 기록 속 그곳

by eco-wood-1 2025. 8. 5.

1. 회기(回基)의 어원은 무엇인가? – 고려의 수도로 향하는 길목

‘회기(回基)’라는 지명을 처음 들으면, 단어에서 느껴지는 고풍스러운 뉘앙스에 낯섦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 특히 ‘회’(回)와 ‘기’(基)라는 한자는 일상 속에서 자주 접하는 조합은 아니며, ‘돌다’, ‘근본’, ‘기초’와 같은 추상적 의미를 담고 있어 지명과 어떤 연관이 있을지 쉽게 유추하기 어렵다.

‘회기’라는 이름의 유래는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는 개경(지금의 개성)을 수도로 두었고, 남쪽과 동쪽을 오가는 길목으로 지금의 서울 동북부 지역을 거쳤다. 바로 이 지점, 오늘날 회기역 주변이 ‘회기’라 불린 이유는, 고려 왕이 지방 순행을 마친 뒤 다시 수도로 돌아오는 ‘길의 시작점’ 혹은 ‘회귀점(回歸點)’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고려의 기록 중에는 이 지역이 ‘회기촌’ 혹은 ‘회기장’으로 불렸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는 왕이 개경으로 돌아가기 전 행렬을 재정비하거나 머무르는 장소였다는 의미로, ‘돌아올 회(回)’와 ‘근거 기(基)’가 그 의미를 암시한다. 따라서 ‘회기’는 단순히 행정구역상의 명칭이 아니라, 왕의 동선을 중심으로 구성된 공간적 이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일부 문헌에서는 이 지역을 ‘회귀(回歸)’의 의미와 연결짓기도 하는데, 실제로 이 지명이 가진 원형이 ‘회귀’였다가 이후 ‘회기’로 정제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처럼 ‘회기’는 추상적 한자 조합 같지만, 그 안에는 고려시대의 왕권 체계, 수도 중심적 통치문화, 공간의 기점이라는 정치적 의미가 응축되어 있다.

 

2. 조선시대에도 이어진 회기의 기능 – 군사와 교통의 요충지

고려 이후 조선시대에도 회기 일대는 서울 북동부의 중요한 교통 결절점으로 기능했다. 조선은 한양을 수도로 삼았지만, 개성과 평양, 의주 등 북쪽 지방과의 교류와 방어는 여전히 중요했기 때문에 이 지역은 군사적으로도 민간적으로도 중요한 길목이었다.

실제로 회기동 주변은 조선시대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회기리’로 불렸고, 당시에도 장시(시장)와 행렬을 위한 마장(馬場) 등의 기능을 수행한 것으로 기록된다. 회기장은 왕이나 고위 관리가 북방 지역을 순시하거나 전쟁 시 군사를 이동시킬 때 중요한 회차 지점이었으며, ‘기지’로서의 성격도 겸했다.

특히 회기 일대는 지형적으로 평탄하고 한강 및 청량천과의 접근성이 좋아 마차나 군사 이동이 용이했고, 이를 기반으로 주변에는 조선 후기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마을과 정거장, 무속 장소 등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회기라는 지명은 단지 ‘돌아오는 곳’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역사적으로 반복된 회귀와 출발의 장소, 교통의 중심지로서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왕이 지나가고, 상인이 지나가고, 군대가 지나갔던 ‘대한민국 동북부 역사로 가는 입구’였던 셈이다.

"회기역 근처는 왜 회기(回基)인가?" – 고려시대 기록 속 그곳

3. 근대 이후 회기의 변모 – 지명 속 잊힌 기억을 복원하다

20세기 이후 근대 도시화가 본격화되면서, 회기라는 이름은 한동안 대중에게 낯선 지명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1974년 경원선 회기역이 개통되면서, 다시금 ‘회기’라는 이름이 서울의 행정 지도로 복귀하게 된다. 이때 붙여진 ‘회기역’이라는 명칭은 단순한 위치표시가 아니라, 과거의 역사를 복원하고 계승한 상징적 결정이었다.

이후 회기 일대는 한국외국어대학교와 경희대학교 캠퍼스의 확장, 청량리와 연결되는 도시철도 교통망 구축 등으로 인해 서울 동북권의 지식문화 거점으로 탈바꿈한다. 대학가의 활기와 젊은 층의 유입은 회기라는 지명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었고, 역사적 이름과 현대적 기능이 결합된 공간으로 재해석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회기’가 단순한 지하철역 이름 정도로 여긴다. 그 안에 담긴 고려시대 왕의 길, 조선의 군사적 기지, 근대 도시의 교통 결절 같은 풍부한 역사적 맥락은 잊혀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배경에서 최근 몇몇 지역문화연구자들과 역사 해설가들은 회기의 어원을 소개하고, 지역 콘텐츠로 재구성하는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도시 속에서 숨겨진 지명의 진짜 의미를 파헤치는 일은 단순한 ‘교양’이 아니라, 공간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역사문화적 복원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회기’는 단순한 장소가 아니다. 돌아오는 길의 시작점이자, 왕도 정치의 무대이자, 오늘날 청년과 지식이 만나는 지점이다. 회기를 걷는다는 것은 곧 서울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어떤 흐름을 반복해 왔는지를 되짚는 일이기도 하다.